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배산임수(背山臨水)도 따지지 않는 공공청사 짓기… 역사에서 뭘 배우나

웃는얼굴로1 2012. 5. 21. 12:37

1930~40년대 중국천하를 쟁취하기 위한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제스(蔣介石)의 전쟁은 음양 풍수에서도 치열했다. 마오쩌둥의 조상 묘가 나라를 세울 명당(開國之地·개국지지)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장제스는 마오쩌둥의 선영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오(毛)씨 집성촌 사람들이 그 선영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선영을 극히 일부만 파괴했다. 그 바람에 마오쩌둥은 훗날 나라를 세웠지만 후손들은 거의 절손되었다. 마오쩌둥도 음양 풍수를 신봉했다. 그의 핵심측근이었던 왕둥싱(汪東興)은 본래 별다른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마오쩌둥이 중용한 것은 그 이름이 '東(마오쩌둥)을 흥(興)'하게 하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2005년 중국 베이징대학(北京大學) 학술대회 참가 때 그곳 대학원생이 들려준 일화다. 음양 풍수에 관한 한 장제스가 마오쩌둥보다 더 열렬히 신봉했다.

192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당시 최고의 풍수사로 알려진 샤오시엔(肖萱)을 찾아가 길지를 잡아줄 것을 부탁한다. 샤오시엔은 장제스에게 제왕지지(帝王之地)의 명당을 잡아주었다. 이른바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다'는 용번호거(龍蟠虎踞)의 지세였다. 그 명당발복 덕분인지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여 1930년, 이미 중화민국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제왕지지의 명당을 가졌으나 1930년 겨울부터 시작한 마오쩌둥 군(홍군) 토벌 작전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화가 난 장제스는 다시 샤오시엔을 불러 자문을 구한다. 대담 후, 장제스는 당시 머물던 호북성 청사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곳으로 옮기게 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를 비웃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다음과 같은 샤오시엔의 자문내용은 상당히 유혹적이었기 때문이다. '청사의 입지와 공간배치는 음양의 조화를 갖추어 한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흉한 일이 생기며, 길지를 택해 조화를 이루면 관민(官民)이 모두 편안해질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음양'이란 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언어로 샤오시엔의 주장을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관청을 짓는데 건물의 전체 윤곽을 살피되, 양명하고, 생동감 있고, 또 통일성을 살려야 한다.'

뜬금없이 마오쩌둥, 장제스, 코르뷔지에를 인용하는 것은 공공청사와 관련해 지금의 우리가 옛날의 그들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선출된 단체장들이 큰 업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신청사 건축'이다. 기존의 시·군 청사를 헐고 새로 짓거나 아예 터를 바꿔 짓기까지 한다. 이왕 지으려 할 바에는 잘 지을 일이지 그렇지도 못하다는 것이 더 문제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표적 사례가 2009년에 지어진 성남시 신청사<사진>일 것이다.

3000억원이 넘은 공사비로 짓기 시작할 때부터 초호화 청사로 비난을 받았다. 첨단 건축양식을 표방한 이 건물은 외벽을 완전히 유리로 덮어 놓았다. 여름철에는 '찜통청사', 겨울철에는 '냉동청사'로서 이미 이 건물은 오명을 날리고 있다. 배산임수도, 좌향도, 그리고 건물 모양도 따지지 않았다. 유지 관리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몹시 불편해한다. 새로운 기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미 독일미국에서 실패로 끝난 방식이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헤겔)는 말은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