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곰
하우스 푸어와 부동산 정책
요즘 부동산 기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아닐까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집을 가진 가난뱅이’ 정도다. 미국에서 하우스 푸어가 생겨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변동금리로 대출을 받아 집을 샀던 사람이 금리가 인상돼 대출이자가 급증하자 수입보다 이자가 많아지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경우와 고정 금리로 대출을 받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부부 중 한 명이 실직함으로써 이자 대비 수입이 더 적어지는 현상이 벌어질 때다.
원리금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이들에게 대출해 준 은행 자체가 부실화된 것이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사태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자 집을 사려는 사람보다 팔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더 하락해 대출 금액보다 집값이 더 떨어지는 이른바 ‘깡통 주택’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에 따라 총자산은 플러스지만 순자산이 마이너스가 되는 하우스 푸어들이 양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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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푸어 양산의 시대?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하우스 푸어는 몇 명이나 될까. 일부 언론의 과장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의미의 하우스 푸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우리나라는 주택 가격에 비해 대출 비중이 높지 않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09년 말 현재 우리나라 평균 담보대출인정비율(LTV)은 34.4%다. 미국 76.6%, 영국 70%, 프랑스 78%, 일본 70~80%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대출 비중이다.
둘째, 금리 인상의 효과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택의 평균 가격은 2010년 7월 기준으로 2억4501만 원이다. 여기에 평균 LTV를 적용하면 평균적으로 8428만 원의 대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계산치는 주택금융공사의 가구당 평균 대출 규모 8342만 원과 거의 유사하다. 이 정도 대출 규모라고 하면 금리가 0.25%가 오를 동안 대출이자는 연간 21만 원 정도 증가한다. 월 2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다.
향후 몇 차례 금리가 더 오른다고 하더라도 대출금리 부담은 한 달에 몇만 원 정도 더 늘어나는 것이다. 아이들의 학원 한 과목도 되지 않는 수준, 외식 한 번 줄이면 해결되는 금액 수준 정도 때문에 집을 팔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고민하는 것은 집값이 지속적으로 내린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집을 팔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아무리 자산이나 소득이 많은 사람이더라도 자신의 집값이 계속 내려간다고 하면 집을 팔고 싶은 충동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자를 낼 형편이 안 돼서 집을 팔아야 하는 순수한 의미의 하우스 푸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미국과 같이 결국 이자 지급 능력이 없어서 집을 팔아야 하는 순수한 의미의 하우스 푸어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경우가 아니다.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에서는 대출이 많은 사람을 하우스 푸어의 범주에 넣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가 과연 맞는 것인지 극단적인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직장인 J 양은 최근 신도시에 50㎡(15평형)의 소형 아파트를 하나 장만했다. 매매가가 1억3800만 원인데 전세가는 무려 1억1000만 원이나 된다고 한다. 취득·등록세를 포함해 모자라는 돈 3500만 원은 신용 대출로 해결했다. 이에 대한 이자는 월 15만 원 정도라고 한다. J 양은 하우스 푸어일까.
전세도 부채이기 때문에 100% 부채로 집을 산 J 양은 사전적 의미로는 하우스 푸어가 맞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 화장품이나 명품 가방을 살 돈도 되지 않는 한 달에 15만 원으로 내 집 마련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 다음 계획은 열심히 저축해 신용 대출을 다 갚고, 그 다음에 더 돈을 모아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그 다음 결혼할 무렵에는 작지만 자기 집에서 신혼을 꾸려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화장품이나 명품 가방에 더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 보기에는 집에 매여 있는 J 양이 하우스 푸어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J 양 본인은 그런 친구들을 미래 준비 없이 그날그날을 즐기며 살아가는 베짱이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고 하기는 어렵다.
가치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화장품이 집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화장품을 사는 것이고, 집이 화장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집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문제를 두고 한쪽의 시각으로 상대를 매도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매도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될 때다.
미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는 모기지 제도가 발달돼 있다. 돈을 모아 집을 사는 우리와 달리 빚으로 집을 사고 30년 동안 천천히 갚아 나가는 제도가 일반화돼 있다. 이 때문에 자기 주택을 보유한 유주택자 비율, 즉 자가 보유율이 우리보다 높다.
주택 보급률, 1000명당 주택 수, 1인당 점유 면적 등 어떤 나라의 주택 현황을 나타내는 지수는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가 보유율이 아닐까 한다. 내 집을 가진 유주택자의 수가 많을수록 안정 희구 세력이 늘어나 사회 전체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집을 가진 사람이 집을 가지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다양한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내 집 마련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대출 끼고 집 사는 게 문제는 아니다
그러면 자가 보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생각해 집값을 내리면 자가 보유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집값이 싸지면 주택을 구매하는 사람의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양 주택에만 해당하는 얘기고, 일반 주택 시장에 들어서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집값이 떨어지면 누군가는 싸게 사지만 누군가는 싸게 팔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제일 먼저 집을 파는 사람은 소위 말하는 하우스 푸어에 해당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집을 싸게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기존에 하우스 푸어라고 불렸던 사람들보다 자산이 더 적고 소득이 더 적은 사람이 사게 될까. 그렇지 않다.
집을 파는 사람보다 자산이 더 많고, 소득도 높은 사람들이 그 집을 헐값에 사게 된다. 결국 부의 편중이 심화된다는 의미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같은 부를 가질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소득도 많고, 이에 따라 자산을 많이 축적한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소득이 많지 않아 자산 축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이때 자산을 많이 축적한 사람이 부동산 등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 공정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면 선진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것이 바로 모기지 대출이다. 자본이 적은 사람에게 대출을 많이 해줘 내 집 마련을 앞당겨 주는 것이 모기지 대출의 순기능이다. 이런 순기능을 강조하다 보니 앞서 말한 서브프라임 사태와 같은 역기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인과 문제점이 이미 충분히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LTV 수준도 80% 정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가 즐비한 나라에서 LTV 수준을 낮추면 은행의 안정성이 높아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자가 보유율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은 자산 축적이 덜 된 사람에게 대출을 해줘 집을 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채무 해결 능력을 넘어 과도하게 빚을 얻어 집을 산 사람들에게 경고의 차원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사람 전체를 하우스 푸어라는 생경한 조어로 묶어 놓고 극단적인 예를 일반화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집을 파는 사람은 자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산이 적은 사람이고, 집을 사는 사람은 자산이 적은 사람이 아니라 자산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어떤 부동산 정책이든지 자가 보유율로 평가받아야 한다. 3년 후 현 정부의 성적표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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