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풍수를 거슬러 라이벌 쳐내는 '逆風水'… 세조는 알고 있었다

웃는얼굴로1 2012. 11. 11. 07:55

'역풍수(逆風水)'. '풍수를 거슬러 뜻을 이룬다'는 의미로서 서유정 PD(SBS)가 수년 전 다큐를 제작하면서 만들어낸 조어다. 역풍수를 통해 라이벌을 불행하게 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뜻이다. 풍수에 정통하지 않으면 이러한 역풍수 행위를 시도할 수조차 없다. 지난번 글에서 조선통치에 유학뿐만 아니라 풍수 등 잡학을 써야 한다는 세조에게 잡학을 배제시키라는 주장을 편 김종직이 파직당한 사건을 소개했다. 세조가 훗날 사림파의 종장이 될 김종직을 경박한 사람이라고 화를 내며 내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세조에게 풍수는 단순한 잡학이 아니었다. 서열상 왕이 될 수 없었던 그가 대군시절부터 오랜 기간의 은밀한 '역풍수'를 통해 드디어 임금 자리에 올랐다고 믿었기에 풍수를 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세조가 젊은 김종직에게서 큰 학자로서 대성할 싹수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정치가로서는 '트러블 메이커'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기현(전북대·퇴계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흐름을 정리한다.

"세조가 통치했던 때를 포함해 조선 중기 이전은 비교적 학문의 자유가 있었다. 흔히 훈구파로 일컬어지는 문신들은 부국강병, 유연한 외교 등을 주장하여 학문 풍토가 그리 경직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훈구파를 밀어내고 등장하는 김종직과 그 학파(사람파)는 성리학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용인하려 들지 않았다. 이러한 학문의 경직화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이름 하에 생각이 다른 자들을 처형하기까지 이르렀다."

가톨릭이 중세를, 마르크스주의가 동구유럽과 소련을 옭아매었듯, 김종직의 성리학은 조선 후기를 질식시켰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터잡기와 공간배치 및 국토조경의 예술'로서 풍수도 점차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겨우 살아남은 풍수는 묘지풍수였다. 조선 중기 이전과 고려의 풍수는 묘지풍수로 한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활용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세조의 역풍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세조의 역풍수는 무엇인가? 1455년, 조카 단종을 내쫓고 임금이 된 세조는 많은 정적들을 죽인다. 이 가운데 목효지란 사람이 교수형을 당한다. 그런데 그는 특별히 죄를 지은 것이 없었다. 사헌부에서도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노비인 데다 애꾸눈인 목효지, 세조 입장에선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 그가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했을까? 세조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15년 전인 1441년(세종 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효지가 세종에게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세자빈이 묻힐 무덤자리는 장자·장손이 일찍 죽을 자리'라는 풍수 상소를 올린다. 세종의 맏며느리이자 훗날 문종의 부인으로 알려진 권씨가 아들(훗날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종 입장에서는 원손(元孫)을 안겨주고 죽은 며느리가 어찌 애틋하지 않겠는가? 세종은 지관들을 동원하여 길지를 물색하게 한다. 한 달 후 경기도 안산시(현재 목내동 산 47번지)로 장지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 터에 대해 일개 노비가 상소를 올려 '장자·장손이 일찍 죽을 자리'라는 극언을 한 것이다(훗날 그 예언은 현실화된다). 당연히 종친과 대신들은 그러한 망언을 한 자를 벌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세종은 상소를 올린 지 3일 만에 노비에서 풀어주고 풍수공부에 전념케 하는 파격적 은전을 베푼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에게는 역풍수의 크나큰 걸림돌의 시작이었다. 다음에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