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계획·개발지도

[대한민국은 개발공화국] 정부 개발사업 1553곳 "총액? 아무도 몰라"

웃는얼굴로1 2011. 3. 8. 11:23

[대한민국은 개발공화국] 2중 3중 승인, 누더기 돼버린 개발 지도
先인프라 後민간투자로 정부·지자체 헛개발 속출
기껏 세금 퍼부어 닦은 길… 일부는 아예 썰매장 돼

경북 영주시 시내를 벗어나 자동차로 10분가량 달리자 논·밭 가운데 불쑥 솟아 있는 육중한 회백색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났다. 짓다가 만 건물 아랫부분은 황토색 타일이 붙여져 있었고 담장 너머로 1m 두께의 주황색 플라스틱 파이프가 보였다.

'동양 최대규모'의 워터파크(4만2000㎡)로 야심 차게 추진했던 '판타시온' 리조트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야외 풀(pool)장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인공 파도가 넘실거려야 할 실내 파도 풀은 물 한 방울 없는 맨바닥이었다. 10층 높이의 콘도 옥상 곳곳에는 철근들이 시뻘겋게, 흉하게 녹슬어 있었다.

이곳이 정부(국토부)와 시(영주)가 지정해 준 '개발촉진지구'라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지어졌다. '개발촉진'은 커녕 지역에 볼썽사나운 골칫덩이 흉물만 더 안긴 셈이 됐다. 2007년 A건설이 이곳에 1800억원을 들여 리조트를 개발하겠다고 나서자, 영주시는 국비 260억원을 지원받아 리조트 앞 영주~순흥 간 도로확장(6m→10m)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건설사가 부도나면서 리조트 사업은 전면 중단됐고 파헤쳐진 사업부지와 짓다가 만 건물은 2년4개월째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 필요도 없는 도로 확장공사에 세금만 쏟아부은 셈인데 원인이 뭔지 챙기는 이도, 날린 돈을 책임지는 당국자도 없다.

동양 최대규모‘워터파크’를 목표로 추진했다가 공사가 중단된 경북 영주시‘판타시온’리조트. 건설사가 부도나면서 사업은 전면 중단됐고 파헤쳐진 사업부지와 짓다가 만 건물은 2년4개월째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무인헬기조종=에어픽스 신성민

◆마을 썰매장 된 온천단지용 도로

1990년대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구' '△△지역' 등 갖가지 명목의 개발사업지구, 지역을 잇따라 지정했다. 정부는 사업타당성 검증조차 제대로 않고 국비와 도비를 지원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토해양부 등 12개 중앙부처가 지정한 지역개발사업 지구·지역은 53종류에 이른다. 이러다 보니 '각종 지구·지역으로 지정된 개발사업 비용 규모가 얼마인지' 현재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고 정부도 시인한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솔직히 개발사업지구로 지정한 곳에 겹치기 지정해서 개발지도는 완전히 떡이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화천군 읍내에서 자동차로 10분쯤 달려 도착한 하남면 거례리. 마을로 들어서자 삼화리로 향하는 화천 3번군도(4.4㎞)가 산속 깊은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 도로에 차량은 한 대도 없었고 근처 마을 어린이 3명이 플라스틱 썰매를 타며 놀고 있었다. 주민 윤모(59)씨는 "겨울에 이 길에는 차가 안 다녀 아이들이 썰매장으로 쓴다"고 말했다.

화천군은 1997년 거례리 일대에서 온천이 발견되자 이곳을 '화천온천관광지'로 지정하고 국비 81억원을 받아 진입도로를 건설했다. 하지만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아 온천 개발사업은 14년째 중단상태다. 화천군은 눈이 쌓이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도로 제설작업도 않고 아예 봉쇄해 버린다. 원래 통행량이 적은 도로여서 주민들도 별 불만이 없다. 세금 81억원을 들여 산속에 '초대형 썰매장'을 만든 셈이다.

◆정체불명 지역 개발에 세금 낭비

한때 자치단체에서 유행했던 드라마 세트장은 물론 박물관·공연장도 지역관광단지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며 전국 곳곳에서 건설됐지만 이젠 세금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충남 부여군은 2008년부터 충화면 가회리 일대(17만㎡)를 '서동요 역사관광지개발사업지구'로 지정, 2012년까지 370억원을 투자하는 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다. 부여군은 2006년 이곳에 60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드라마 '서동요'의 세트장(충화면 가화리)을 지었다. 드라마 상영 당시 입장객이 28만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4만명으로 7분의 1로 줄었다. 한 해 입장료 수입은 3600만원밖에 되지 않아 시설 유지·운영비조차 건지기 힘들다.

인천옹진군 북도면 시도에 만든 '슬픈 연가' 세트장,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리에 만든 '장길산' 세트장도 운영할수록 적자만 쌓이는 바람에 사실상 문을 닫은 상태다.

이렇게 된 데에는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지방개발사업이 '선(先) 정부의 인프라 투자, 후(後) 민간투자 유치' 방식으로 진행된 영향이 크다. 정부가 세금으로 지방에 도로·박물관 같은 시설을 먼저 지어놔야, 나중에 민간투자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논리가 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지방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곳곳에서 개발사업이 중단되고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면서 세금만 축내는 사업장이 속출하는 것이다.

장철순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역의 경제발전과 주민의 복지를 위해 써야 할 돈을 중앙 정부와 지자체가 부실한 개발 사업에 쏟아부어 낭비하고 있다"며 "난립하는 지역개발 사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