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주택을 찾아서]<12>서울 성북구 '김진흥가옥'
국토교통부가 2015년부터 100년 주택인 '장수명 아파트' 인증제 도입에 나선다. 유럽에선 100년 주택 찾기가 어렵지 않지만 고속성장을 하며 재개발·재건축을 해온 국내에서는 100년 넘은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주택이 100년 이상을 버텨내려면 유지·관리비도 만만치 않다. 100년을 버텨온 주택을 찾아 역사와 유지·관리 노하우, 어려움 등을 알아본다.
[[100년주택을 찾아서] < 12 > 서울 성북구 '김진흥가옥']
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 안채. 현재 사찰 대웅전으로 쓰고 있다. /사진=김유경기자
순조 셋째딸 덕온공주 남편 살던 집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 중문에서 들여다본 안채/사진=김유경기자
조선 상류주택 격식 … 문화재 지정
새주인 김진홍씨 불교 교단에 기부
60년대이후 개발 거치며 가옥 축소
年보수비 2억 책정됐지만 관리부실
시멘트·벽돌벽등 엉터리 복원 지적
150년 전엔 멀리서도 눈에 띄었을 99칸짜리 대저택인 덕온공주 부마의 집 '장위동 김진흥가옥'. 지금은 우후죽순 들어선 일반 양옥들에 둘러싸여 골목길을 돌아돌아 들어가야 나온다.
솟을대문은커녕 예쁜 돌담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위치를 모르면 스윽 지나치기 쉽다. 특히 담을 일반 양옥 담벼락처럼 시멘트로 처리해 고택이라는 느낌이 없다.
'장위동 김진흥가옥'은 조선시대 순조의 셋째딸 덕온공주의 남편 윤의선과 그의 양자 윤용구가 살았던 약 150년된 저택이다. 사랑채 대청의 상량문에 적힌 을축년을 근거로 고종 2년(1865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덕온공주(1822~1844년)가 살았던 집은 아니라는 얘기다.
성북구의 정밀실측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김진흥가옥은 조선말기 덕온공주 묘소에 딸린 제청에서 출발해 일반 살림집으로 바뀐 사례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상류계층 살림집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둥이나 보, 창문과 지붕 등 세부 기법도 전통적인 상류주택의 격식을 충실히 지켜 문화재로 지정됐다.
김진흥씨가 이 집을 소유한 것은 1965년부터다. 김씨가 33년간 이곳에 거주하면서 서울시문화재 민속자료 제25호(1977년 9월5일)로 지정돼 문화재 명칭도 김진흥가옥이 됐다. 이후 김씨가 1998년 재단법인 선학원에 기부하면서 집의 이름이 진흥선원이 됐고 현재 안채는 대웅전으로, 안채 별당채는 지장전으로 사용된다.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 안채 전경/사진=김유경기자
이곳에서 만난 스님은 "김진흥씨 슬하에 자녀가 없어 사찰에 집을 기부했다"며 "덕온공주도 자녀가 없어 남편 윤의선씨가 양자를 들였는데, 이 때문에 '자손이 없는 터'라는 얘기도 나온다"고 귀띔했다.
본래 이 가옥 주변에는 덕온공주의 묘소가 있었다. 덕온공주가 결혼 8년 만에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고 그 옆에 제청을 지어 윤씨 일족이 건물을 관리한 것이 이 가옥의 출발이라는 게 성북구의 추정이다.
이후 집을 확장해서 윤씨 후손들은 이곳을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김진흥가옥의 현재 주소는 서울 성북구 돌곶이로34길 4-11(장위동)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경기 고양군에 속했다.
기록에 따르면 덕온공주 제청과 묘소 일원은 매우 넓었으나 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로 경관과 지형은 물론 묘소까지 사라지는 변화를 겪었다. 1962년 8월18일 윤용구의 손자 윤영섭으로 소유권이 바뀌었을 당시 주소는 장위동 76번지였으나 지금은 76-59번지로 축소됐다. 현재 이 가옥의 연면적은 478.42㎡다.
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 사랑별채/사진=김유경기자
김진흥가옥은 문화재 지정후 1993년과 1998년 2차례에 걸쳐 보수공사를 시행했다. 지금도 연간 2억원 정도의 예산이 책정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는 집인데도 관리가 잘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히 최근까지 어린이집으로 사용된 사랑별채의 경우 창호 등은 빠른 시일 내에 보수해야 할 것 같았다.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 사랑채 /사진=김유경기자
스님은 "차라리 우리한테 보수공사를 하라고 하면 더 잘 할 텐데 문화재여서 우리가 손을 못댄다"며 "겨울이면 너무 추운데 복원한다면서 오히려 더 살기 어렵게 고치고 있다. 예산의 반이나 실제 보수공사에 쓰이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한옥 전문가들은 문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복원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1989년과 2003년의 평면도를 보면 안채의 부엌이 상당히 바뀌었다.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 안채 별당채. 현재 지장전으로 사용되고 있다./사진=김유경기자
행랑채는 광 위주였던 실내를 대부분 방으로 고쳐 종무실 등으로 사용한다. 집에는 별도로 보관하는 문짝이 있는데, 김진흥이 가옥 인수 후 창호를 개조할 때 떼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안채 안마당 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안채 서쪽에는 안별당이 있는데 정자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벽을 최근 벽돌로 쌓아올려 100여년된 건물로 보이진 않는다.
안별당 뒤로는 장독대와 후원이 있다. 그렇게 안채 뒤로 돌아가면 사랑채와 사랑별채가 'ㅁ자형'으로 보이는 사랑별채 마당이 나온다. 마당 한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가 있어 정원 느낌을 준다.
현재 비어있는 사랑별채는 김진흥가옥에서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건물이다. 본채 대청마루 종도리 장여측면 상량문을 보면 '乙巳 三月十五日 卯時'(1905년 3월15일 오전 5~7시)라고 표기돼 있다. 윤용구(1853~1939년)가 살림채로 사용하면서 1905년 신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류성룡 계명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는 "원래 장위동 부마의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된 'ㄹ자'형의 화려한 평면"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사랑별채가 추가되고 행랑채가 안채와 연결되면서 현재의 평면이 나왔다는 게 류 교수의 설명이다.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사진=김유경기자
진흥선원의 스님은 이 가옥의 특징 중 하나로 창호를 강조했다. 3중창인데다 일반 창과 달리 'ㄷ자형'과 'ㅓ자형'으로 창문이 포개져 방풍효과가 크다는 것. 후원에 있는 철쭉은 100년도 더 돼서 하나의 큰 나무가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성북구는 정밀실측 결과 현재 1865년으로 돼 있는 안채의 건축시기를 다시 추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추정근거가 불명확하고 공주의 생몰연대인 1844년과도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마감한 행랑채 정면의 화방벽은 문화재 경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철거하고 원형대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문화재는 집뿐 아니라 주변 경관도 보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머니투데이 김유경기자 yunew@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진흥 가옥' 입구/사진=김유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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