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 國運風水(국운풍수)] 남산2호터널 기운에 매출 떨어지자… 塔 쌓아올려 '액막이'한 신라호텔

웃는얼굴로1 2014. 5. 11. 01:56

땅이 병들면 풍수물로 방어… 이를 일컬어 '비보진압풍수'

실제 효과 여부는 잘 몰라도
위기 때 재빠르게 대처하는 지도자의 덕목인 건 분명

 [Why][김두규 교수 國運風水(국운풍수)]
신라호텔의 돌탑(왼쪽)은 충살을 막기 위한 액막이 탑이다. 선조 임금은 도성의 지기가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오른쪽)를 세웠다. / 김두규 제공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소박하면서도 외로운 돌탑 하나가 서 있다. 소박하다고 한 것은 탑이 웅장하지도 정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양식이다. 외롭다고 말한 것은 대개 이러한 돌탑들은 좌우에 짝으로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이 탑은 홀로 서 있기 때문이다. 무슨 사연으로 언제 왜 누가 세웠을까. 풍수학계의 선배이자 의형(義兄)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필자에게 사석에서 들려준 이야기이다.

"2000년대 초의 이야기이다. 남산2호 터널이 2년 동안의 보수 공사 끝에 재개통되었다. 그런데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갑자기 신라호텔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다. 남산2호 터널의 충살(衝殺)이 그대로 신라호텔을 때리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돌았다. 흔히 이러한 소문이 돌면 경영을 맡은 책임자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미신으로 무시하고 화를 내거나 아니면 신속한 초동 대응으로 이를 제압하는 것이다. 당시 신라호텔의 경영을 맡은 책임자는 후자를 택하였다. 급히 전북 진안 어느 마을의 노인 대여섯 명을 섭외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그곳의 돌들을 트럭에 싣고 상경케 하여 곧바로 탑을 쌓게 하였다. 곧 탑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충살을 막아주는 액막이 탑이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신라호텔의 매출은 다시 급성장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이렇게 돌탑을 쌓는 것은 이른바 비보진압풍수의 한 행위이다. 광화문의 해치석상, 경회루의 연못,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東廟) 등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비보진압풍수물이다. 해치석상과 연못은 경복궁의 강한 불기운(화기·火氣)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동묘는 도성의 지기가 수구를 통해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조 임금의 지시 아래 조선과 명나라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국제적 비보풍수물이다.

기(氣)가 허(虛)한 것은 보(補)하고, 실(實)한 것은 사(瀉)하는 허실보사(虛實補瀉) 용법으로 한방에서 약·뜸·침 등을 쓰지만, 풍수에서는 땅에 병이 생기면 탑·연못·나무·언덕·사당 등 다양한 도구들을 치료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한 이유로 풍수를 '땅을 치료한다'는 의미의 의지술(醫地術)로 부르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 비보진압풍수물이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는 이른바 불연기연(不然其然)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참된 지도자의 덕목이라는 점이다. 선조 임금이 동대문 수구처(水口處)에 관우 장군을 모시는 사당(동묘)을 세우게 한 것은 당시 기나긴 전쟁으로 이반된 민심을 재결집하고, 구원군 자격으로 도성에 주둔하며 행패를 부리던 명나라 군사들을 달래고, 마지막으로 명나라 조정에는 조선의 진심 어린 감사를 표시하여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고자 하는 다목적 정치 행위였다.

최 교수가 들려준 신라호텔의 돌탑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신라호텔의 매출이 떨어진 것이 경영 부실이거나 경기 흐름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거나 아니면 남산2호 터널의 충살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위기가 알 듯 모를 듯 다가오고 있다는 기미(機)를 간파하고(見) 과감·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도자(군자·君子)는 기미(낌새)를 보고 행동을 취하되 하루가 다 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君子見機而作不俟終日)'는 것이 주역이 말하는 지도자의 덕목이다. 비보진압풍수 행위의 주체는 다가오는 위기를 간파하고 재빠르게 대처하는 지도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