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첫째 왕비 옆에 못 묻힌 영조… 아비 잃은 정조의 '풍수 복수'

웃는얼굴로1 2012. 7. 16. 03:06

서오릉(西五陵)은 경기도 고양에 있지만 서울과 인접하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어 연인과 가족이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에 참 좋다. 그런데 요즈음 서오릉을 대표하는 것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이 아니라 어느 후궁의 무덤이다. 숙종의 후궁으로 인현왕후와의 암투(실은 남인과 서인 간의 권력싸움) 끝에 사약을 받아 죽은 장희빈 묘이다. 이렇게 장희빈 묘를 많이 찾는 것은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사극에 자주 등장하여 시청자들에게 '유명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지미, 남정임,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김혜수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장희빈 역을 맡아 그녀를 변명해준 덕이다. 장희빈 때문에 오는지, 당대 최고의 배우들 때문에 오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필자가 찾아가는 곳은 장희빈 묘가 아니다. 장희빈 묘를 지나 작은 고갯길을 넘어간다. 고개를 넘으면 우측에 또 하나의 능이 있다. 홍릉(弘陵·사진)이다. 영조의 첫째 부인 정성왕후 무덤이다. 죽고 난 뒤 남편(영조)을 빼앗긴 억울한 여인의 무덤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손자 정조 임금에 의해서이다. 사연은 이렇다.

1757년 정성왕후가 죽자 영조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왕비 무덤을 왼쪽으로 약간 치우치게 하여 오른쪽을 비워 '십(十)'자 모형의 조각을 새겨 묻었다. 영조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함께 묻힐 생각이었다. 공식적인 영조의 수릉(壽陵)인 셈이다. 그로부터 20년 후 영조가 죽는다. 이때 '할아버지(영조)는 손자(정조)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버지를 의지하고' 살아왔던 관계를 파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손자 정조가 할아버지 유언을 거부해버린 것이다. 풍수상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동시에 '장례집행위원장'격인 총호사 신회를 파직시킨다.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또 그가 추천한 지관이 풍수에 능하지 못하였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였다. 신회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죽임에 동조했던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가 추천한 지관은 정조의 최대 정적 정후겸(정조의 고종 4촌)이 평소 부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반대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당시 정조 나이 26살, 혈기가 넘친 탓이었을까. 당장 반박 상소가 올라온다. 상소를 올린 이는 황해도사 이현모였다.

"홍릉 오른쪽 자리는 영조 임금께서 유언하신 곳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하십니까? 풍수설은 공자·맹자가 말하지 않은 바이니, 장사 지내는 것은 공자·맹자를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정조는 이현모를 당일로 관직에서 쫓아내면서 꾸짖는다.

"그대는 공자·맹자만 알고 주자·정자는 모르는가? 마땅히 엄하게 혼을 내야겠지만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 같으니 상소를 돌려준다. 집에 가서 주자의 '산릉의장'을 깊이 공부하길 바란다!"

왜 갑자기 공자·맹자와 주자·정자 논쟁인가? 공자·맹자 당시에는 풍수설이 없었다. 그러나 주자·정자가 생존하였던 11세기에는 풍수설이 이미 하나의 완벽한 사상 틀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 정자는 '장설'을, 주자는 '산릉의장'이란 풍수론을 집필하였는데 중국과 조선의 풍수 수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글들이다. 결국은 정조의 의지대로 영조는 부인이 잠든 홍릉에 묻히지 못하고 구리시 동구릉의 원릉(元陵)에 안장된다. 손자에 의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떨어져 '사후 이별'을 한 셈이다. 문제는 정조가 잡은 원릉이 길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효종이 묻혔다가 이장해 나간 파묘 터였다. 왜 정조는 할아버지를 파묘 터에 모셨을까? 정조의 불안한 운명과 정국 운영의 시작이었다. 다음에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