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③ 간송 아들 우송 전성우의 성북동 집

웃는얼굴로1 2011. 5. 10. 01:57


간송미술관에서 언덕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우송 전성우 선생(오른쪽)과 매듭장 김은영 여사의 집이다. 가로로 길게 지은 단아한 1층 집이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인다.


거기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것은 마음속 깊은 닻이다. 다빈치와 로댕을 보고 돌아와도 겸재와 추사를 다시 만나면 우린 배 속 깊숙한 곳에서 은은하게 회심의 미소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어떤 사람에게 1년이란 단위는 봄·가을, 간송미술관에 두 번 가는 것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간송미술관은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고맙고 뜨겁고 기꺼운 곳이다. 실은 나는 간송에 갈 때마다 ‘여기는 개인공간입니다’라고 쓰인 안쪽을 은근히 기웃대곤 했다. 소나무 우거진 언덕 위쪽에 산다는 간송의 후손들을 만나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달까. 아무튼 오래 꾸는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이 우리 생의 비밀이다. 나는 드디어 백 년은 넘음직한 소나무들이 수십 그루 모여 막 송화를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산벚이 꿈속처럼 하얗게 흩날렸다. 산꿩이 기억처럼 한가하게 울었다. 발 밑에 여기 저기 제비꽃이 밟히는 뜰에 서자 길쭉하고 환한 집이 나타났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44년간 집안 대소사를 뜰에서 치르다



버선의 선을 살린 지붕.

이곳이 간송의 아드님 전성우(77) 선생의 집이다. 그의 아내는 시인 김광균의 따님이신 김은영(70) 여사다. 모습과 태도와 말씨가 두루 향긋하고 온화하고 정갈하다. 이건 계급적인 말로 들릴까 조심스럽지만 둘 다 몸에서 귀족 티가 줄줄 흐른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나는 정말 자세히 쓰고 싶다.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나 미국의 명문 케네디가만 우러러 볼 게 아니다. 간송이 서화와 도자기로 우리 자존심을 지켜줬듯 훌륭한 가문의 귀한 행적들은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역사에 아름다운 무늬를 더해줄 것이다.

둘은 1966년 약혼했다. 신랑 전성우는 스무 살에 미국으로 떠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소식을 뒤늦게 듣고 서른둘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영 아메리칸 21명’에 뽑혀 뉴욕 전시도 열고 이미 미국 유수 화랑의 전속화가로 활동하던 그였다.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어요.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절망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 내 그림에서 색을 지웠어요. 푸른 색만 남기고.”(전성우)



진달래 화전과 녹차로 차린 다과상. 집 뜰에서 캔 쑥으로 만든 쑥개떡도 봄철 다과상에 자주 오르는 메뉴다.

“세 번 만났는데 어른들이 오래 끌면 좋을 게 없으니 얼른 결정을 하래요. 그래서 5월에 약혼했어요. 약혼한 후 이 터에 곧바로 집 짓기를 시작했어요. 어머님께 듣기를 아버님이 생전에 이건 성우 집을 지을 터라고 미리 잡아놓으셨대요. 집이 완공된 이듬해 5월에 혼인을 했지요.”(김은영)

그게 벌써 44년 전이다. 둘은 44년간 이곳에 살면서 2남2녀를 낳아 길렀다. 어머님의 상을 여기서 치렀고 아이들의 돌잔치를 여기서 했고 네 아이 중 둘은 결혼식도 집 뜰에서 했다. 마침내 지난해는 전성우 선생의 희수연과 김은영 여사의 칠순 잔치를 동시에 이 마당에서 옛 법도대로 치렀다. 이건 가히 미적 장관이다! 한 부부의 탄생과 완성을 고스란히 지켜본 집이 서울 한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당사자뿐 아니라 듣는 나까지도 뿌듯하게 만든다. 품격과 자존심이란 이런 것이리라. 물론 아무나 이렇게 할 순 없다. 누군가 몇만 이렇게 우리 긍지를 지켜주면 된다. 서양식 의례의 범람 속에서 우리 것을 망가뜨리지 않고 지켜주기만 해도 족하다.

나는 이 집에서 어떤 방식으로 차를 내오는지를 주의 깊게 지켜봤다. 과연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옻칠한 상에 작은 옻칠 쟁반을 얹고 다시 그 위에 백자 접시에 진달래 화전을 곁들였고 곁에도 다시 옻칠 쟁반 위에 놓인 백자 다기에 녹차가 부어졌다. 희고 검고 붉고 푸른 오방색에 눈뿌리까지 시원해진다. 아까워서 차마 음식을 입에 넣을 수가 없다.

아이 넷 날 때마다 화실 떼어내 방으로



1 손님 방. 조선시대 침상과 벼루·연적 등 간송 전형필 선생이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2 거실 전경. 전면 창으로 소나무 숲이 잡힐 듯 보인다. 3 우송 선생의 화실. 4 장독대. 우송의 어머니가 만들어 둔 장독대를 며느리 김 여사가 물려 쓰고 있다.

“집을 지을 때 염두에 둔 건 두 가지였습니다.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살아서 그곳 선큰 룸(Sunken room)이 마음에 들어 그걸 적용하고 싶었고 길쭉하게 단층집을 짓고 싶었어요. 물론 화실도 욕심껏 크게 지었죠. 그땐 아이를 넷이나 낳을 줄을 몰랐지요. 하하.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면서 화실을 조금씩 떼어내 아이 방으로 만들었어요.” 집은 약 330㎡(100평)다. 그중 화실이 99㎡(30평)였다.

김수근은 친구였고 김중업은 이웃에 살았다. 둘 중 누구에게 설계를 맡길까를 고민하다가 살림집에 더 맞을 듯한 김중업을 택했다.

“네 귀가 버선코처럼 살짝 들린 김중업 스타일이 우리 집 지붕선에 남아 있지요.”

신부는 이화여대에서 생활미술을 전공해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다. 신랑 또한 조형에 민감한 화가였다. 둘이 새 삶을 시작할 신혼집이니 얼마나 꾸는 꿈이 많았을까.

“저 천장은 배의 갑판으로 만들었어요. 당시 좋은 나무가 그것밖에 없었어요. 인천 가서 갑판으로 쓰려던 나무를 사다 저렇게 격자무늬를 짜 넣었어요. 저기 벽난로를 쌓은 돌은 남한산성에서 가져온 화강암입니다. 성벽을 쌓은 돌이 개울가에 마구 뒹굴고 있었는데 그걸 싣고 왔지요.”(전성우)

“중간에 화장실만 빼면 이게 원룸구조예요. 실내가 심플해서 40년 넘게 살아도 물리지를 않아요.”(김은영)

식탁이 놓인 공간보다 서너 계단 아래 놓인 선큰 룸은 과연 실내에 깊이와 변화를 준다. 창 앞은 우거진 소나무다. 거실에서 보는 소나무와 식탁에서 보는 소나무는 뉘앙스가 달라진다.

“저기 바람이 불면 파도 소리가 들려요. 그걸 송뢰라고 하지요. 차 마시는 사람들은 물 끓는 소리에서도 송뢰를 듣는다지요.”

전성우 선생의 말은 귀 기울일수록 고요하다. 전성우 선생을 말하면서 평생 만다라를 그려온 ‘화가’라고 말하지 않고 대뜸 간송의 아드님이라는 모자를 씌워버리는 것은 자칫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간송의 이름을 빼놓고 어찌 그를 말하랴.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유화 물감을 사주며 아들을 화가로 기른 주역인 것을! 그의 호는 아버지 ‘간송(澗松)’과 장인 김광균 선생의 호 ‘우두(雨杜)’에서 한 자씩 따온 ‘우송(雨松)’이다. 생전에 절친했던 최순우 선생이 지어줬다.

그림 그리는 남편 곁에서 평생 실을 물들여 매듭을 맺어온 김은영 여사는 호가 ‘송리(松里)’다. 무형문화재로 ‘매듭장’ 칭호를 얻었고 몇 해 전엔 신사임당상도 받았다. 이 집 복도엔 간송의 큼직한 붓글씨가 걸려있다. “옥션에 나왔다기에 얼른 달려가서 사왔어요.” 그 맞은편엔 우송의 ‘청화 만다라’가 걸렸고 창 앞엔 송리의 고운 매듭이 살짝 드리워졌다. 또 비껴 보이는 벽면엔 ‘전민아’라고 사인된, 우송 둘째 딸의 세련된 추상화가 놓여있다. 핏줄은 이렇게 흘러 역사가 된다. 600년 된 소나무가 자라는 이곳 간송미술관의 터는 모두 1만6500㎡(5000평)다.

화신백화점을 설계했던 프랑스인에게서 아버지가 이 터를 사셨대요. 1929년께였는데 그때 성북동 땅 한 평 값이 눈깔사탕 한 개 값이었대요. 하하! 한옥을 지어 내가 네 살 때 완공이 됐는데 기념으로 이웃에 홍백 떡을 돌리던 게 기억나요. 김환기 선생이 이웃에 사셨지요.”

아아,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 위로 솔향이 화르륵 날아왔다.


거실·현관·침실·화장실에 화병 … “꽃에서 기를 얻죠”



현관 앞 꽃 장식(左), 거실 소파 옆 탁자위. 가족 사진과 함께 개구리 상을 여러 개 뒀다.

우송 전성우 선생의 집에는 꽃 장식이 넘쳤다. 거실과 현관 앞, 침실·화장실과 식탁 위…. 세어 보니 모두 일곱 곳에 화병을 놓고 꽃을 꽂아 뒀다. “꽃에서 기(氣)를 얻는다”는 안주인의 오래된 취미다.

김은영 여사는 대학교 1학년 때 국내 ‘화예 강사 제1호’로 꼽히는 임화공 선생에게 꽃꽂이 개인교습을 받았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지하에 있었던 임 선생의 꽃집에 찾아가 구도를 잡고 높이를 맞추는 꽃꽂이의 기본을 배웠다. 그때가 1960년. 벌써 반세기 전 일이다. 당시 이화여대 생활미술과에 다녔던 김 여사는 미국 잡지 ‘하우스&가든’을 구해 읽으며 예쁜 꽃꽂이를 따라 했을 정도로 꽃꽂이를 좋아했다. 그러니 결혼 후 집안 곳곳에 꽃을 꽂아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꽃꽂이 방식은 바뀌었다. 결혼 전엔 오아시스나 침봉을 사용해 꽃을 꽂았지만, 결혼 후엔 항아리에 그냥 꽂는다.

“우리 전통 꽃꽂이 방식이에요. 민화나 의궤를 보면 꽃꽂이 장식이 자주 등장해요. 고려자기에도 매병이란 게 있잖아요. 매화를 꽂아뒀던 병이죠. 옛 선비들도 방에 꽃꽂이를 해 둔 거예요.”

이렇게 그는 꽃꽂이의 전통을 우리 문화재에서 읽어내 현대적인 감성으로 복원해 냈다.

그에게 매주 화요일은 꽃시장에 가는 날이다. 처음 결혼해서는 남대문 시장에 다녔는데,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가 생긴 뒤론 그곳의 단골이 됐다. 르네브·마르코폴로·델피니움·카사블랑카 등이 그가 즐겨 사는 꽃. 봄에는 꽃망울을 터뜨린 조팝나무 가지를 한 다발 사 달항아리에 꽂아둔다.

꽃과 함께 김 여사가 실내장식에 활용하는 소품은 개구리 상(像))이다. 5대양 6대주 세계 곳곳의 개구리 상을 600여 개나 모았다.

“신혼 초 최순우 선생님(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댁을 방문했을 때 개구리 상의 멋을 처음 알게 됐어요. 하얀 자기 접시 위에 물을 붓고 초록 개구리 상을 두 개 넣어 두신 게 어찌나 시원해 보이던지요. ‘예쁘다’ 감탄했더니 최 선생님이 선뜻 한 개를 주시더라고요.”

그게 그의 1호 개구리가 됐다. 그 뒤로 여행갈 때마다 개구리 상을 샀다. 99개를 모았을 땐 남편 전 선생에게 “100번째 개구리는 당신에게 선물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자그마한 황금 개구리가 그의 수집품 목록에 오르게 됐다.

대부분의 개구리 상은 장식장 속에 보관하지만, 그중 몇 개는 생활 공간 깊숙이 들어와 있다. 거실 탁자 위 개구리 상은 솜방석에 앉아 가을·겨울을 나고, 경칩이 되면 물이 담긴 백자 접시 속으로 들어간다.

“개구리 상엔 뜻밖의 효용도 있어요. 처음 저희 집을 방문해 약간 서먹해하는 손님들이 ‘아유, 개구리가 있네요’라며 말문을 트는 경우가 많아요.”

손님 청하길 좋아하는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자랑이다.

이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