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후]젠트리피케이션의 역설..젊은 활기 사라진 후폭풍은
90년대말 강북 최고 상권 명성에 프랜차이즈 몰리며
임대료 폭등에 떠밀린 젊은 자영업자들 가게 옮겨가
홍대·서교동·상수동도 상권 형성되자 악순환 되풀이
죽은 상권된 신촌은 권리금 없는 빈상가도 남아돌아
#"월세라도 낮았으면…."
김진수씨(가명)가 처음 서울 신촌(서대문구 창천동) 대학가에서 주점 문을 연 시기는 2000년 초였다. 어릴 때부터 희망한 소방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 학비를 벌어보겠다고 성산동 동네친구와 동업을 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 20대 초반의 더벅머리총각이던 김씨는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그동안 김씨가 섭렵한 가게메뉴도 참 다양하다.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세계맥주전문점부터 퓨전 일식주점, 철판볶음밥까지 능력이 닿는 가게라면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눈코 뜰새 없이 십수 년이 지났지만 지금 김씨에게 남은 것은 지난 봄 마지막 가게를 접을 때 돌려받은 권리금과 가게보증금 1억1000여만원이 전부다.
그렇다고 장사가 안된 것도 아니다. 적잖은 기간에 장사하는 도중 아는 사람의 가게를 잠시 봐준 치킨집을 제외하곤 파리를 날려본 경험이 없다. 업종을 바꿔도 김씨의 가게를 물어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단골도 꽤 많았다.
문제는 임대료였다. 그동안 김씨의 가게는 신촌에서 홍대로, 홍대에서 상수동으로 이사해야 했다. 돈을 모아볼 새도 없이 임대료가 뛰었고 그때마다 김씨는 떠밀리듯 가게를 옮겨야 했다.
◇신촌에서 홍대로, 홍대에서 상수로…임대료 난민된 자영업자들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등에 둘러싸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일대(이하 신촌)는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강북에서 제일 잘나가는 상권 중 하나로 꼽혔다. 시대별 대학가 유흥문화를 대변이라도 하듯 어떤 때는 단위면적당 주점수 전국 1위를, 어떤 때는 PC방 전국 1위를 기록했다.
그러던 신촌이 언제부턴가 죽어가는 상권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대로변에 이어 골목까지 프랜차이즈음식점, 커피전문점, 편의점이 들어서면서 김씨와 같은 젊은 자영업자들이 짐을 싸기 시작하면서다.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던 젊은 상인들이 떠나고 난 신촌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프랜차이즈가게들만 남았고 남다름을 좇아 신촌을 찾던 학생층과 젊은 직장인들의 발길도 점차 끊겼다.
신촌상권이 쇠퇴하면서 바로 옆에 위치한 지하철 홍대역 인근 상권이 뜨기 시작했다. 젊은 예술인들이 거리공연을 하던 홍대역 8번출구 인근 공원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소품가게, 옷가게가 생겨났고 수제맥주, 막걸리전문점 등 새로운 트렌드의 주점들이 문을 열었다.
김씨도 2000년대 중반 가게를 홍대로 옮겨 생맥주집을 차렸다. 줄어든 손님 수로는 도저히 신촌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당시 이미 김씨와 같은 골목에서 장사하던 가게 6~7곳이 신촌을 등진 상태였다.
김씨는 홍대로 옮긴 지 얼마 안돼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홍대상권이 급속히 붐비면서 김씨 생맥주집의 상가임대료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2004년 이전했을 때 보증금 8000만원에 월 100만원이던 상가임대료는 2년 뒤인 2006년 보증금 1억원에 월 200만원으로 뛰었다.
결국 김씨는 다시 임대료 피난을 떠났다. 김씨는 이렇게 서교동으로 상수동으로 2~3년마다 가게를 옮겼고 그때마다 김씨의 가게는 차츰 대로변에서 멀어졌다.
◇원주민 떠난 골목에는 찬바람만
김씨는 지금 장사를 처음 시작한 신촌으로의 복귀를 준비한다. 지난 15년간 인근 상권을 떠도는 사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지금 신촌에는 권리금 없이 보증금과 월세만 내면 임대할 수 있는 상가도 적지 않다”며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 인근 공인중개소에 따르면 홍대, 상수동은 물론 인근 망원동도 49㎡ 안팎 크기의 가게를 얻으려면 권리금을 적게는 4000만~5000만원에서 많게는 2억원 이상 줘야 하지만 신촌(창천동)에는 권리금이 붙지 않은 상가 임대매물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 이전 임차인이 떠난 후 수 개월 이상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빈 상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창천동 H공인중개소 관계자는 “신촌상권 중 핵심으로 꼽히는 연세로(신촌역과 연대 정문을 관통하는 도로)에 위치한 1층 상가마저 몇 달째 임대수요를 찾지 못하고 빈 가게로 남은 경우가 있다”며 “큰 길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상가건물이나 높은 층 상가는 권리금이 아예 붙지 않은 곳도 있다”고 설명했다.
신촌에서 10년째 주점을 운영하는 이주하씨(가명)는 “일대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음식점인 ‘○○○○’의 경우 5~6년 전 3억원을 웃돌던 권리금이 지금은 1억원 이하로 떨어졌다”고 귀띔했다.
임대료가 저렴한 구도심 상권이 번성한 이후 대기업 프랜차이즈나 상가투자 수요가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소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의 한 단면이다. 임대료 부담을 이기지 못한 젊은 상인들이 짐을 싸면서 상권이 활기를 잃고 쇠퇴해가는 경우다.
얼마 전 신촌상인연합회가 서울시와 손을 잡고 임대상인 영업기간 보장, 임대료 상승 억제 등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대책을 마련한 것도 하루빨리 지금의 분위기를 돌려놓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김씨는 “그래도 처음 장사를 시작한 곳인데 상권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같아 안타깝다”며 “초심으로 돌아가 함께 노력한다면 사람으로 넘쳐나던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엄성원 기자 airmas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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