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 國運風水] 계룡산 도읍지 무산시킨 하륜… '풍수 쿠데타' 통해 조선의 핵심 권력가로

웃는얼굴로1 2014. 7. 7. 02:42

역사를 해석하는 데 방법이 하나만 있을 수 없다. 특히 고려·조선사에서 풍수를 배제하면 온전한 파악이 불가능하다. 일찍이 이병도 박사가 '고려시대 연구'(1948)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고려시대는 500년간 음양지리 사상과 도참사상이 일관하여 정치·경제·사회·법 속에 큰 교섭을 가지고 있던 만큼, 이 사상은 실로 고려의 흥망성쇠에 큰 관계를 가지고 있다. … 만일 이를 전연 무시하고 고려를 해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조선 개국 과정에서도 풍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도전(鄭道傳)과 하륜(河崙), 둘 다 조선 개국 공신이었으나 그 기여도에서 보면 하륜은 정도전에 비해 미미하였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죽임을 당하여 잊혔으나 하륜은 태종의 묘정(廟庭·사당) 한편에 모셔져 500년 동안 나라의 제삿밥을 먹는다. 하륜은 어떻게 권력 중심부에 진입했을까? 바로 풍수를 통한 쿠데타를 통해서다. 1393년 12월 경기관찰사 하륜은 상소를 한 장 올린다.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 지내면서 여러 풍수 서적을 대략 깨쳤습니다. 지금 듣기로 계룡산 땅은 산은 북서쪽에서 오고 물은 남동쪽으로 빠져나간다 하는데, 이것은 송나라 풍수사 호순신이 말한 '수파장생(水破長生·산과 물의 흐름이 아주 나쁜 방향)'으로 곧바로 망할 땅입니다."

이 상소 한 장으로 1년 넘게 진행돼 주춧돌까지 놓였던 계룡산 도읍지 계획은 취소된다. 더불어 하륜이 정국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필자는 이를 '풍수 쿠데타'라고 표현한다. 당시 호순신의 풍수는 조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 고려 왕조에서도 지리업(地理業·풍수를 다루는 관직) 시험 과목에 포함되지 않는 풍수였다. 하륜은 이 새로운 풍수를 주무기로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조의 핵심 권력가로 떠올랐다.

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에 있는 하륜(河崙)의 묘.
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에 있는 하륜(河崙)의 묘. / 김두규 제공
풍수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도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륜의 상소를 접한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여러 왕릉이 호순신의 풍수에 부합하는지 조사·보고하도록 하였는데, 단 며칠 만에 그대로 부합한다는 보고서가 올라온다. 개성 부근의 수많은 왕릉을 짧은 시간에 조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왕릉의 길흉이 호순신 풍수에 부합한다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륜이 미리 각본과 실행 계획을 짜 놓은 뒤 상소를 올린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하륜조차도 호순신 풍수의 내용을 정확하게 깨치진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하륜은 계룡산 도읍지가 '수파장생'이라고 하였으나, 정확히는 조금 다른 방향인 '수파양(水破養)'에 해당한다. 이성계의 다른 신하들은 그 오류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됐다면 하륜의 정치적 도전은 산산조각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륜은 아버지 무덤(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도 호순신 풍수에 부합하지 않게 자리를 잡았는데, 이 또한 하륜이 호순신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지는 몰라도 통달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상소와 계룡산 도읍지 취소를 계기로 이성계는 하륜더러 서운관에 저장된 비록(秘錄)을 모두 읽게 한 뒤 천도할 땅을 다시 살피도록 한다. 천기누설이 담긴 책들을 열람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특권이었다. 이후 그가 이방원의 측근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동구릉에 있는 이성계 무덤(건원릉)도 하륜의 작품이었다. 그는 1416년 함경도에 있는 왕실 조상 무덤들을 살피러 갔다가 사망한다. 순직한 하륜을 이방원은 자신의 팔과 다리이자 나라의 기둥이었다고 애도한다. 하륜에게 최고의 영광이었다.

한반도 풍수사(風水史)에서 하륜의 의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하다. 고려의 지리업 고시 과목 아홉 개를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풍수 서적들로 대체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수를 십학(十學·열 가지 교육기관) 가운데 하나로 포함한 당사자였다. 조선 500년의 풍수는 하륜의 풍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