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땅에도 맥이 있다… 사람 살리는 생맥, 죽이는 사맥, 반쯤 살리고 반쯤 죽이는 미친맥

웃는얼굴로1 2013. 1. 22. 09:02

웬만한 집 거실이나 CEO 집무실 벽에 산수화(山水畵) 한 점 정도는 걸려 있다. 왜 산수화를 걸어 두는가? 풍수적 관점에서는 그 이유가 분명하다. '산은 인물을 주관하고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山主人, 水主財)'고 보기 때문이다. 좋은 산은 좋은 인물을 배출하고, 계곡에 흐르는 물은 재물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상징한다. 효창원도 삼각산과 한강을 산과 물로 하여 생겨난 한 폭의 산수화였다. 훌륭한 인물과 풍부한 재물이 넘치는 부강한 조선을 꿈꾸었던 정조 임금의 소원이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효창원)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정기호 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는 말한다. "정조 임금이 이곳에서 한강 너머 남쪽을 바라보았고 훗날 실현될 사도세자 무덤의 수원 이장, 화성과 새로운 도로(시흥대로) 건설을 선견하였다. 새로운 길을 내고, 새로운 성을 쌓고,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아들(문효세자)과 아버지(사도세자)의 무덤을 도성 남쪽에 잡았다.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삼각산과 한강 사이에 있는 곳이라면 모두 길지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지맥이 있어야 하고, 그 지맥을 따라 지기가 흘러야 한다. 그런데 그 지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맥(生脈)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사맥(死脈)이 있고, 그 중간에서 사람을 반쯤 죽이고 반쯤 살리는 반생반사(半生半死)의 미친 맥이 있다. 미친 맥에도 다시 교회나 절터가 되기에 적당한 귀맥(鬼脈)이 있고, 유원지나 러브 호텔이 들어서기에 좋은 유맥(遊脈)이 있다. 따라서 지맥의 성격을 파악(捉脈·착맥)하기란 쉽지 않다. 지맥 잡기가 매우 어려웠던 까닭에 이에 대한 풍수서 '착맥부(捉脈賦)'가 나올 정도였다. 도간(陶侃·259~334)이 지은 책이다. 그는 중국 진나라 때의 유명한 정승이었다. 시인 도연명의 증조부이다. 도간은 어머니를 길지에 모시려고 풍수 공부를 하던 끝에 그 경험을 책으로 남긴다. 이 책은 조선 왕조에서 지관 선발 과목으로 채택되어 500년 동안 조선의 국토관에 영향을 끼친다.

착맥, 즉 지맥 잡기는 누가 잘하는가? 지사(地師)인가 아니면 직관이 뛰어난 지도자인가? '착맥부'의 저자 도간이나 정조 임금과 같은 후자들이다. 지난번 글에서 정조가 만들었던 효창원을 일제가 없애버렸고 다시 그 터를 알아본 사람이 백범과 계초(啓礎) 방응모였음을 이야기하였다. 1946년 7월 계초의 후원으로 백범이 이곳에 순국열사 묘역을 만들었다. 백범이 1945년 11월 말에 중국에서 귀국하였으니
백범이 얼마나 이 일을 중시하였으며 서둘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백범과 계초가 만난 것은 두 가지 인연 때문이다. 첫째, 해방 직후 남한에 귀국한 두 지도자 우남(이승만)과 백범 가운데 계초는 백범을 체질적으로 선호했다. "계초는 이승만보다 민중을 대변하는 평범한 김구를 생리적으로 좋아하고 편하게 대했다"(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또 하나의 인연은 계초의 땅 보는 안목 덕분이다. 계초는 원래 정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다가 평안북도 삭주의 어느 산골로 들어가 금맥을 찾는다. 그때가 1920년 초의 일이다. 금맥도 다른 지맥과 마찬가지이다. 선처럼 가느다란 금맥 한 줄기가 바위 속에 흐르기에 오랜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하는 직관 없이 금맥 찾기가 불가능하다. 계초의 땅 보는 안목은 수년간의 금맥 찾기에서 형성된 것이다. 땅 보는 안목(풍수)은 결국 사람 보는 안목(관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백범은 10대 후반에 관상과 풍수를 공부하였다. 해방 직후 백범과 계초가 서로 만나게 된 것도, 그리고 백범과 계초가 효창원에 대해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원초적 경험의 공통집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효창원을 통해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다면, 백범은 이 땅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어떤 미래를 꿈꾸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