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조선 르네상스 정신의 상징 효창원, 日帝가 없앴지만 백범이 가치를 알고는…

웃는얼굴로1 2013. 1. 7. 15:10

"땅에도 팔자(命·명)가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각계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우리 시대의 시인 김지하도 가끔 이 말을 하곤 한다. 땅의 팔자는 변하지 않는다. '동작릉(중종 후궁 창빈 무덤)'이 '동작동 국립묘지'로 바뀐 것이나 '효창원(문효세자 무덤)'이 순국열사의 묘가 된 것도 땅의 팔자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땅의 팔자가 변하지 않지만 그 땅의 주인이 바뀌거나 때에 따라 영욕이 달라지는 것은 운이 변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이 바뀐 대표적인 예가 효창원이다.

효창원은 원래 문효세자의 무덤이었다. 서른 다섯 정조 임금의 당시 유일한 혈육인 문효세자가 다섯 살 때 갑자기 죽었다. 정조는 선대 왕릉 부근에서 자리를 찾지 않고 새로운 곳을 찾는다. 왕이 기존 능 부근이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다. 기득권을 고집하려는 신하들에게 '새로운 조선' 혹은 '정조의 조선'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이후 문효세자 무덤 근처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 등의 무덤이 추가로 생겨난다. 이곳은 수십만 그루의 소나무와 묘역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로 한양 최고의 경승지가 된다.

그러나 조선이 몰락할 즈음 일본 군대가 주둔을 하고, 부근에 일본인들이 거주를 하면서 이곳은 점차 파괴되기 시작한다. 지속적으로 이곳을 잠식하던 일제는 1920년대에 조선 최초의 골프장을 허가한다. 무덤 위로 골프공이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더라도 전 왕조의 왕릉은 보존해주는 것이 동양사의 불문율이었다. "1930년대 이곳은 당시 40만 경성부민의 행락지로 전락하였다. 일본 국화인 벚꽃도 당연히 심어졌다."(김해경 박사·전통문화대학교)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전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모자라 1940년대 일제는 이곳에 영면하던 조선 왕족들을 서삼릉 쪽으로 옮겨버린다. 이때는 이미 일본인 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쓴 '조선의 풍수'가 발간된 지 한참 뒤였다. 무라야마 지준은 "한국 문화의 이면적·근본적 현상 가운데 하나가 풍수"라고 결론지었다. 그것을 알고도 일제가 효창원을 없앤 것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 임금을 지우고, 더 나아가 조선의 정신을 지우고자 함이었다.

한동안 주인을 잃은 이 터가 다시 주인을 찾은 것은 해방 이후 일이다. 이 터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백범(白凡) 김구다. 백범은 어떻게 이 땅의 성격을 알았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좀 있다. 1892년 소년 백범이 해주에서 시행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다. 실망하던 백범에게 아버지가 입신양명책으로 풍수와 관상 공부를 권한다.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수(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백범일지) 그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관상서 '마의상서'를 공부하지만 실망하고 만다. 자신의 관상을 보니 '천격, 빈격, 흉격뿐이어서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다가 죽을' 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가 이 책에서 희망을 얻은 것은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떻게 하면 마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지않았다. 답답하여 관상 공부를 그만두고 풍수 공부와 병법으로 넘어간다. 백범이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다. 백범이 독립운동 시절과 귀국 후에 사람과 땅을 직관함에 있어서 젊은 나이에 접했던 관상과 풍수는 원초적 체험으로 작동한다. 효창원은 어떻게 순국열사의 묘역이 되었을까? 계초(啓礎) 방응모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다음에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