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인물형으로 본 風水

웃는얼굴로1 2011. 9. 25. 16:35

유유자적하는 화평을 누린다는 신선형
선인은 도를 닦아서 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 상상의 인물로서 흔히 신선이라 이른다. 신선을 민간 신앙의 하나로 믿고 장생불사를 누리는 곳으로 승천하기를 바라며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과 27계급의 선인을 그리던 신선설이 있었고, 이것은 뒤에 노자 사상과 맺어져서 도교로 발전하였다.선인과 관련 된 터에서 태어난 인물은 다함 없는 수명과 유유자적하는 화평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갖춘 것으로 여긴다.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상좌리에 신선형을 띄고 있는 집이 있는데, 이 집은 바둑 두는 신선터에 자리한 까닭에 대대로 태평을 누리며 살아왔다. 제주도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많이 일어났으나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신선형에는 춤추는 신선형, 책읽은 신선형, 구름 속의 신선형, 바둑 두는 신선형, 구름에 노는 신선형, 피리 부는 신선형, 소탄 신선형으로 나뉜다.

 

옥녀형, 절세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의미

옥녀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이다. 우리나라 각지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평북 맹산과 충북 진천에서는 절세의 미인으로, 충남 서산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남해안 일대에서는 남녀합궁의 뜻으로 등장한다.
옥녀는 본디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로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다. 경남 거제의 옥녀봉에 관해 옥황상제의 옥녀가 내조암 약수터에 내려와 사슴과 더불어 놀다가 목욕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옥녀는 선녀와 같은 존재로 보인다. 옥녀는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에 해당하는 지형으로는 전남 보성군 낙안읍으로 이곳은 옥녀가 머리를 푸는 형상을 띠고 있다. 옥녀가 머리를 푸는 것은 화장을 해서 단정한 용모를 갖추기 위한 것으로, 따라서 이 고을에서는 만인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오르는 인물이나 여러사람의 주목을 받는 재자가인들이 많이 나오리라 한다.

머리 푼 옥녀형의 경우 안산으로는 빗모양의 산을, 오른쪽으로 거울 모양의 산을 그리고 왼쪽에는 분갑과 기름병 형태의 산을 거느리면 더욱 좋다.

장군형, 전략상 방어에 유리한 지형
마주 앉은 장군형은 두 개의 험준한 봉우리가 마주 서 있는 형세를 이르는 말이다.이러한 곳은 군사 전략상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평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 길지로 비쳐졌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기록된 것만도 천번 이상이나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려왔던 까닭에 피난처를 이상적인 주거지로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지형에 해당하는 곳으로 제주도 북제주군 성읍이 있는데 이 마을은 한라산에서 흘러내린 맥이 서쪽으로 휘어 들어 왼쪽의 영주산에 이르고 오른쪽의 설오름과 갑선이 오름으로 이어진다.
또 읍 맞은편에는 남산봉을 중심으로 아심선이와 본지 오름이 둘러서서 마치 삼태기 안에 들어앉은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을 서쪽과 마을 안 외대문 자리에 군막의 말뚝을 박았던 돌이 있으며 동헌 자리가 바로 장군이 앉은 터라고 한다.


야자형, 뛰어난 문장가가 태어날 지형
야자는 문장을 끝맺는 마지막 글자이므로 이 터에서는 뛰어난 문장가가 태어날 것이라 여긴다. 또 야자형 앞뒤에 천자형과 호자형의 지형을 갖추면 천하명당이 된다.
천자문에서처럼 문장의 첫머리를 천으로 시작하고 끝을 호로 맺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북 김제군의 월촌면이 이러한 야자형이며 장화리에 한 집터가 그 중심부이다. 풍수의 말에 따라 화기를 꺽기 위해 사랑 마당에 못을 파고 우물도 마련하였으며 안행랑채를 세운 지 5년 만에 헐어내었다.

용자형, 천지의 정기가 함께 뭉친 형상
용자에는 해와 달이 들어 있으므로 천지의 정기가 함께 뭉친 형상을 나타낸다.
경북 안동시의 한 집이 이 형에 해당 하는데 이 지형을 동쪽에서 보면 두 개의 동문과 네귀가 반듯한 안뜰을 네군데에 배치하여 용자를 만들었다.
이밖에 삼정승을 낳으리라는 삼상산실과 장수하리라는 불사간, 도둑이 들지 않는다는 퇴도문까지 두었다. 특히 퇴도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99칸으로 이루어진 이 집에서는 동과 서 양쪽에 문을 달았지만 남쪽에만은 문을 내지 않고 담을 쳐 두었다고 한다. 어느날 집을 유심히 살펴본 탁발중이 남쪽에 작은 문이라도 내면 도적을 막을 것이라 말해 도적을 걱정하는 이 씨가 그말에 따라 작은 문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어떤 도적이 작은 문으로 달아둔 곳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발을 들여놓자 마자 눈앞이 캄캄해졌으며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붙들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도적들 사이에는 이 문에 발을 들여놓으면 눈이 멀게 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한편, 이 집 동북쪽에 있는 방은 삼정승이 태어날 것이라 일러 왔으며 방 이름도 영실이라 불렀다. 상주군 낙동면의 류씨집으로 시집을 갔던 딸이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막았음에도 기어이 이 방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집의 며느리가 이 방에서 기거하며 임신을 해서 몸을 풀어도 정승감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는 이 방 앞의 영천은 이른바 응진수(應眞水)로 응진수는 지기가 뭉쳐 있는 곳에서 솟아나는 물로서 용의기세를 타고 뿜어 나오므로 물을 마시면 부귀를 누린다.
따라서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성이라야 물의 정기를 받아 위대한 인물을 낳을 수 있으므로 그것은 외손이라야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日)자형 - 세상을 밝힐 인물이 태어날 터
일자형 터에서는 해처럼 세상을 밝힐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리라 한다. 경북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 이에 해당하는 향단이 있다.
이 집은 북쪽에서 바라보면 남북보다 동서가 긴 장방형 건물한가운데에 남북으로 지붕이 들어앉아서 한눈에도 일자형임을 알 수 있다. 공간을 이렇게 배치한 것은 집의 운세가 태양처럼 뻗쳐 나가기를 바래서이다. 그러나 이 집의 평면 구성은 다만 풍수적인 의미를 지닐 뿐 주거공간으로서의 기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평면 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통로가 좁으며 마당이라 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 답답한 느낌을 주며 무엇보다도 채광이 잘 되지 않아 집안이 언제나 어둡다.

물(勿)자형 - 세사람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터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 손씨집이 이집터에 해당한다. 손소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집터를 고를 때 풍수는 기름진 땅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면서 현재의 산비탈 자리를 잡아 주었다.
또 그는 마을 뒷산의 문장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물자형 이고 그 혈맥이 바로 손씨 집터에 뭉쳐 있다면서 삼혈식 군자지처(三血食君子之處)인 이 집에서 세 사람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대로 손중돈과 이언적이 출생 하였다. 손중돈의 자는 대발, 호는 우재로서 공조와 이조판서 그리고 세자시강원 빈객을 지낸 뒤 도승지를 세 번, 대사간을 네 번, 경상, 전라, 충청, 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중종 때 청백리에 뽑혔으며 경주의 동강서원과 상주의 속수서원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이언적의 자는 복고, 호는 회재로서 부제학, 이조, 예조, 형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3등에 올랐다. 그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서 이황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선조 때 영의정에 추종되었다. 그런데 이언적은 앞의 손중돈의 누이동생 아들이다. 이씨네 집으로 시집을 갔던 그네가 친가에 돌아와 낳은 것이다.
따라서 손씨 집에서는 세 인물 가운데 한사람을 이씨네에 빼앗겼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품(品)자형 -위대한 인물이 배출할 지형
충북 단양군 적성면 품달촌에 이런 지형을 가지고 있는 터가 있는데 품달촌은 태백산과 소백산의 양맥이 자리한 양맥낙지(兩脈落地)의 터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풍수인들은 이곳에서 위대한 인물 셋이 배출되리라는 예언을 하였으며 품달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에서 비롯되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세인의 관심을 끈 인물로는 우탁과 유척기이다.
우탁은 성균관 제주를 지냈으며 당시 원나라를 통하여 정주학에 관한 서적이 들어왔으나 이를 해득할 자가 없던 중, 그가 한 달 동안 연구한 끝에 알아내어 후진을 가르쳤으며 경사와 역학은 물론 복서에도 능통하였다.
유척기는 이조 참의,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뒤에 영중추부사와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당대의 명필로 널리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