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효창원은 연꽃이 한강에 고개숙인 형국… 순국 선열 모시고 문화대국 꿈꾼 백범

웃는얼굴로1 2013. 2. 4. 07:22

서울시 제공

설날이 다가온다. 설날을 전후하여 조상의 무덤을 찾는다. 우리에게 조상 무덤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사를 지내는 것은 죽은 사람의 뼈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묻는 것이며, 신령스러운 것은 산천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자체가 신령스러운 것이다." 어느 풍수서의 한 대목이다.

1945년 말 귀국한 백범이 서두른 것이 해외에서 순국한 열사들의 유골을 봉환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46년 5월 3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유골이 일본에서 부산항에 도착한다. 백범은 서울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이들을 영접한다. 당시 선우진 정인보 방응모 안낙생 안우생 등이 동행했다. 두 달 뒤인 7월 효창원에 세 의사의 유골을 안장했음을 지난번 글에서 밝혔다. 맨 첫 자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안장하려고 비워두었다(6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안 의사의 유골을 찾지 못해 지금도 빈 무덤으로 남아 있다).

백범에게 효창원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해방 후 남과 북에서 순국선열을 위한 묘역 조성에 대한 관심은 백범이 가장 빨랐다. 이어서 1955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동작동 '국군묘지'(현재의 '현충원')가 만들어진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75년에서야 비로소 '혁명열사릉'(평양 대성산)을 만든다. 백범이 이곳 효창원에 순국열사의 무덤을 조성하면서 희망했던 대한민국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군사강국도 경제부국도 아닌 문화대국이었다. 백범은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부(富)는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과연 효창원은 그러한 땅으로 적절할까?

효창원에서 남쪽으로 한강을 바라본다. 이어서 북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효창원 바로 뒤쪽에 있는 '용산노인전문요양원→효창로즈아파트→배문중·고등학교→만리재→환일고등학교→아현'으로 이어지는 지맥을 밟아본다. 그리고 인왕산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지맥 위에 자리한 효창원 터의 형국을 정리한다.

풍수의 형국론은 독일 철학자 후설(E. Husserl)의 현상학적 방법론과 비슷하다. 후설은 서구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비판한다. 그런 방법으로 땅을 보면 기껏해야 '땅값이 얼마인가'밖에 볼 수 없다. 그 땅이 갖는 '참된 삶의 세계(Lebenswelt)'를 놓쳐버릴 수 있다. 개개인의 삶의 세계도 객관적으로 인식하거나 측정할 수 없듯이 땅도 그러하다. '직관적으로 사물을 관조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풍수 또한 그러한 직관을 강조한다.

효창원은 무슨 형국일까? 연화도수(蓮花倒水)! 연꽃(효창원)이 물(한강)을 보고 고개를 숙인 형국이다. 이때 꽃대는 인왕산에서 효창원으로 이어지는 지맥이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평가는 아닐까? 이러한 필자의 직관을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사진>'(한양고지도:1850년대)가 뒷받침한다. '수선전도'는 효창원의 뒷산(현재 효창원로 93-95길 일대)을 '연화봉(蓮花峯)'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산자 혹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곳을 연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화도수와 백범의 문화대국론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친김에 다음번 글에서 효창원과 이를 품고 있는 서울의 풍수까지 살펴보자. 이를 통해 우리나라 국운의 향방을 가늠해 보자는 것이다. 마침 새로이 대통령도 취임하고 설날도 멀지 않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