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역학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단종 어머니·문종 묘자리 '흉지'로 고른 세조… 그 흑심, 풍수인에겐 들켰다

웃는얼굴로1 2012. 12. 10. 10:20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 현릉(제5대 문종 및 현덕왕후 권씨). / 조선일보 DB

도선국사나 무학대사와 같이 건국에 기여한 신안(神眼)들은 땅을 보고서 어떻게 그 길흉화복을 예언하였을까? 직관이다. 직관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초월적 힘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적 지도자' 역시 그러한 직관을 바탕으로 한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은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살아가는 어느 순간 외부 세계로부터 고개를 돌려라. 눈을 감아라. 그리고 내면을 투시하라. 어느 순간 자신의 내면에서 신의 계시와도 같은 영혼의 불꽃이 타오를 것이다.' 그 영혼의 등불로 인간과 사회 그리고 대지를 비추어본다면 누구나 예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세조 임금에게는 분명 '카리스마'가 있었다. 단종을 쫓아내고 임금 자리에 오른 뒤 왕권 강화, 부국강병, 문화창달 등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모범적 생활을 하였다.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에게 대군 시절부터 태클을 거는 이가 있었다. 어느 이름 없는 풍수학인이었다. 지난번 글에서 세조가 임금에 오른 지 몇 달 만에 노비 출신의 지관 목효지(?-1455)를 처형하였음을 이야기하였다.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는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목효지 역시 땅에 관한 한 약간의 예지력이 있었다. 세조의'역풍수(逆風水)'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세조는 서열상 임금이 될 수 없었다. 이미 세자(훗날 문종)가 있었고, 또한 세손(훗날 단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역풍수를 통해 임금에 올랐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세자(문종)빈 권씨가 죽자 '바닷가에 명당 없다'는 금기를 깨고 안산 바닷가에 무덤 자리를 잡게 한 것도 수양대군(세조)이었다. 이에 노비인 목효지가 그 자리가 세종의 맏아들과 맏손자(훗날 문종과 단종)가 죽을 자리라고 공언하였다(1441년).

세월이 흘러 1452년 문종이 죽었다. 이번에도 능자리 선정에 주도권을 잡은 이는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 역시 풍수에 능했다. 왕조실록은 '세조(수양대군)가 손수 장서(葬書·풍수서)를 쥐고 가부(可否)를 독단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해 5월 수양대군이 형님 문종의 능자리로 잡은 자리는 현재 국정원이 있는 내곡동 헌인릉 부근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목효지는 은밀히 단종에게 그 자리가 흉지여서 결코 쓸 수 없다는 글을 올린다. 핵심은 '주인은 약하고 손님이 강하다(주약객강·主弱客强)'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단종은 이 글을 강맹경에게 보였는데, 강맹경은 당시 수양대군의 측근이었다. 수양대군이 이 글을 보는 순간 어떠했을까? '주인'은 당연히 문종과 단종이고 '손님'은 수양대군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수양대군의 속마음이 들킨 것이다. 수양대군은 노비가 임금에게 편지를 올렸다는 죄목으로 곤장 100대를 치게 한다. 그해 7월 수양대군이 잡았던 자리에 광중을 팠다. 광중을 파는데 물이 솟았다. 당황하여 근처에 다시 광중을 파게 하였다. 이번에는 돌이 나왔다. 결국 목효지의 말이 적중한 셈이다. 대신들 사이에 목효지가 추천한 곳(양주 마전)을 가보자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묵살한다. 대신 수양대군은 건원릉의 동쪽으로 정한다. 그렇게 해서 문종의 무덤(지금의 현릉)은 지금의 구리시 동구릉 안에 자리하게 된다. 건원릉 동쪽으로 잡게 된 과정이 허접스럽다. "무지개가 나타나서 동쪽 건원릉에 닿았다"는 이유에서이다. 수양대군에게 목효지는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죽일 수가 없었다. 실권이 없지만 조카인 단종이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목효지를 나름대로 챙겼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역풍수'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조선을 자신과 그 후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수양대군의 '역풍수'는 계속된다.